본 음반은 작곡가 백병동의 후기 작품에 해당하는 해금을 위한 일곱 개의 작품이다. 기존에 발표된 <비우고, 가고>‧<뒤틀림에서 초연(超然)의 피안(彼岸)으로>․<명(冥)-2>․<운(韻)-7>과 더불어 2016년 백병동의 팔순을 기념하여 위촉한 <소리의 행방(行方)>․<빈약한 올페의 회상>․<화장장(火葬場)에서> 초연작을 담고 있다. 이는 백병동이 해금을 위해 작곡한 전(全) 작품으로, 백병동이 태생적으로 갖는 한국적인 정서와 우리음악에 대한 통찰을 평생에 걸쳐 확립한 자신의 음악언어에 투영하여 탄생시킨 작품들이다. 이 음악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음악으로 관통하며 현대음악계에 커다란 궤적을 남긴 거장 백병동과 전통음악에 깊숙이 천착하여 전통어법을 체화함과 동시에 현대적인 주법과 음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연주자 천지윤의 합작품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2016년 10월 5일 금호아트홀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2 : 백병동〕 실황 음원.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은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여 탐구한 후 전통적인 맥락과 현대적인 맥락 사이의 음악적 접점을 발견하고, 이렇게 발견된 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합적으로 이용해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펼쳐가고자 한다.
천지윤의 해금 : 관계항2 : 백병동
연주자 노트
2007년 대학원 졸업 연주 때 연주했던 백병동의 <98년 9월 오늘, 뒤틀림에서 초연의 피안으로>는 주법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무대 위에서 연주로 완성된 작품으로 썩 마음에 들었었다. 정악, 산조 등의 전통음악과 더불어 주로 김영재의 창작곡들을 다뤄왔던 나로서는 생경하고 낯선 선율들이었다. 그 선율들을 하나하나 조합해놓고 보니 묵직한 침묵 속, 마디마디의 외침이 절절히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 2009년 음반 <후조(後彫)> 작업에 착수하며 선곡을 놓고 고민하던 중 디렉터이자 연주 파트너였던 기타리스트 이성우 선생님께 이 곡을 제시했고, 이성우 선생님은 몇 년 전 소프라노와 연주했던 <비우고, 가고> 라는 곡이 아름다웠다며 제시했다. 이 두 곡을 해금과 기타를 위해 개작 의뢰했고, 기존에 발표되었던 <명(冥)-2>라는 곡도 함께 수록하여 2012년 음반이 완성되었다. 연습 과정 동안 작곡가가 제시한 악보에 최대한 가깝게, 음정과 리듬, 강약, 다이나믹, 그리고 곡이 주는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전통음악만을 10여년 간 연주한 나에게 백병동의 곡들은 가학적이라 할 만큼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 KBS ‘국악한마당’에서 <명>을 녹화 방송했다. 이때, 백병동의 세계를 보다 가슴으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멍 하니 있으면 선율이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가슴에까지 와 닿았다. <명>은 제목으로 보아 죽음의 세계를 표현한 곡이다. 죽음을 접한 이의 모노드라마 같은 느낌, 혹은 대사 없이 표현되는 무용수의 표정이나 몸짓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실감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세운다는 것. 음악의 세계는 언어보다 더 빠르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준다는 것, 구체적인 형상으로 체현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명>은 내가 아껴듣던 김소희 명창, 그리고 정회석 명창의 심청가 중 <곽씨 부인 상여 나가는 대목>과 오버랩 되곤 했다. 심봉사가 아내의 죽음 앞에 실성 발광할 지경으로 울부짖는 소리. 여기서 나는 백병동의 음악과 전통음악 사이의 접점을 실감했다. 한국적 정서라는 개념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개별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 혹은 또 다른 고통에 직면하여 소리 내는 방식이, 우는 방식이, 그것을 소리로 표현한 이면의 형상이 전통음악과 통하고 있다는 실감.
2012년 이후 주로 작은 연주회장에서 백병동의 곡을 연주했다. 여러 번의 연주를 통해 백병동의 작품이 내게 용해되었다는 느낌 또한 들었다. 손가락으로서가 아닌, 내 마음 한 켠의 자연스런 노래가 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표현의 방식에 있어 클래식기타와 같은 유율 악기의 경우 음정에 일관성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경우 크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기타와 조응하며 내 나름 해금 고유의 멋을 부려보기도 하고, 전통음악에서 쓰이진 않지만 어딘가 내 내면 깊숙한 소리로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음색을 자유롭게 표현해보기도 했다.
좋은 곡이란 무엇일까 고민해본다. 그 중 하나는 연주자를 성숙하게 할 수 있는 곡이겠다. 그 방법이 작곡가의 차원 높은 정신세계, 심미안, 예술적 감각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 최대 난제를 주었을 때 일수도 있겠다. 백병동의 곡들은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나를 성장하게 한 곡이라 생각한다.
기존에 발표한 <비우고, 가고>, <뒤틀림>, <명>과 더불어 새로운 곡을 의뢰하고 싶어 작년 말 백병동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마침 2016년은 팔순을 맞이할 기쁜 해이다. 새롭게 구상한 곡의 제목은 <소리의 행방>. 백병동은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태어나 8.15 해방과 6.25 전쟁 등 나의 세대가 상상하거나 공감하지 못할 아픔을 겪은 세대다. 세대가 겪은 공통적인 아픔 이상으로 백병동의 음악은 많이 고통스럽고, 처절한 절규의 연속이다. <소리의 행방>은 소리를 쫓아온 여든 해 동안의 해답이라 할 수 있을까. 치열하게 소리를 찾아 살아온 인생에 <소리의 행방>은 마침내 어디를 향해야 할까. 자유롭게 마음껏 해석하여 연주하라고 하신다.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쓴 곡이라고 하셨다.
더불어 초연되는 <빈약한 올페의 회상>, <화장장(火葬場)에서>는 선생님의 음반들을 듣다가 계속해서 귀가 멎고, 또 멎기에 음반 자켓에서 제목을 찾아보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를 따라 죽음의 세계로 간 ‘오르페우스’와 ‘화장장’을 소재로 둘 다 죽음에 관한 곡이다. 왜 이런 비통한 소재 앞에 귀 기울여졌는지 모르겠지만, 두 곡 역시 해금으로 연주하고 싶었다. 시를 읽어보니 시의 울림이 크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호응하여 거기에 선율을 붙이고 그것이 또 다시 언어를 배재한 소리로 거듭났을 때, 또 다른 울림을 주리란 믿음으로 개작을 의뢰하였다.
그렇게 하여 본 공연은 일곱 개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비우고, 가고>, <뒤틀림>은 나 자신과 혹은 세계와 불화할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명>, <올페>, <화장장>은 죽음의 세계를 그린다. <소리의 행방>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잇는, 소리(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궤적을 그려낸 작품이라 생각된다. <운>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백병동이 고민해온 소리 그 자체에 관한 성찰이다.
성악곡을 개작한 <비우고, 가고>, <올페>, <화장장>은 시 자체의 울림을 노래로 형상화한 것인 만큼 자연스런 노래가 되길 희망한다. <명>, <운>, <소리의 행방>은 순수 기악곡으로 위의 곡들과는 다른 성질의 곡이다. 내는 소리 (내드름, 시작하는 소리), 그 이후 긴장을 가파르게 형성해나가는 선율의 조합이 짜릿하고 스릴감 있다. 그건 백병동의 정신의 속도와 깊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한 긴장을 내려놓을 때에 허탈한 마음, 이완을 다스릴 때에 절대 이완이 없는 예민한 정신세계, 그것은 백병동이 세상을 바라보는 냉정한 통찰일 것이다. 그 이후 이뤄내는 여백. 그것은 작가의 절대고독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여백에서 큰 울림이 남기에 나는 백병동의 곡을 좋아한다.
백병동의 작품 세계가 방대하기에, 또 나의 음악적 조상은 바흐가 아니기에, 백병동의 7개의 해금곡 이외에 대해선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실감하는 것은 백병동은 곡을 통해 절절하게 와닿는 메시지를 보낸다는 점, 연주자로서 나는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는 점이다. 전통음악에 있어 명인들은 평생의 가락을 정리하여 산조 한바탕을 짠다. 해금연주자인 나에게 일곱개의 작품은 백병동 인생의 생사고락과 희노애락을 평생에 걸쳐 확립한 자신의 음악 언어에 담은 ‘백병동 산조 한바탕’으로 환원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