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음반은 조선시대 풍류음악을 출발점으로 한다. 풍류는 시(詩), 그림, 노래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며 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와 노래에 집중하여 새로운 음악을 생산하였다. 시적 텍스트의 범위를 확장하여 현대시를 중심으로 작곡가와 교류한 결과물인 현악 중주곡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 가곡·가사·시조를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해금 독주와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을 병행한 작품인 <어부사(漁父詞)#>를 연주한다.
<관계항2 : 백병동> 연습 과정에서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라는 시를 곰곰 들여다보았다. 최하림의 시를 백병동 작곡가가 노래로 만든 곡으로, 원곡을 듣다 해금으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해금곡으로 개작을 의뢰한 것이었다. 개작된 악보에는 선율 아래 가사가 적혀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레 시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시어들은 몸과 마음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다녔다. 몸과 마음이 어떠한 색채로 물드니 자연스레 소리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텍스트는 소리를 보다 유연하게 만들고 음표 이상의 어떤 것을 표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일상 언어로 구성된 산문이나 소설과 달리 시어는 짧은 언어에 많은 것들을 품고 있으며 단단하다. 수많은 침묵이 켜켜이 쌓인 듯. 어쩌면 언어가 없는 소리를 낸다는 것은 수많은 침묵을 품은 시어를 내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란 생각이 든다. 언어가 없는 상태. 이는 언어로 표현(구상, 한정, 가둬지기)되기 이전의 무한(無限)을 품은 추상(抽象)적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무한에 대해 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는 아름답다. 그렇기에 텍스트를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어가 없는 추상적인 음악 언어에 오래도록 길들여진 기악연주자의 신분으로, 텍스트를 중심에 둔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텍스트로 인해 마음과 몸의 결에 변화가 일어나고, 마침내 소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는 소리가 ‘소리(음표) 이상의 무엇’이 될 것. 그것은 내 음악의 이상이자 바람이 되었다. ‘소리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은 시적 텍스트에서 내가 간혹 느낀 것처럼 그것은 색채이며, 음영이고, 촉감이며, 온도이고, 움직임이며, 속도다. 좋은 음악은 이러한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여 그곳에 나를 존재하게 한다.
<관계항2 : 백병동>의 작품 중 ‘빈약한 올페의 회상’과 ‘화장장에서’를 연주하며 시어가 가진 남루한 마음 때문일까. 폐허가 되고 재만 남은 텅 빈 도시가 떠올랐다. 텅 빈 도시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나와 그 공간에 소리를 울린다. 소리는 여기저기 타다 남은 재와 터지다만 폭탄에서 새어나오는 연기 아지랑이처럼 초라하고 연약하다. 그 이미지는 연습을 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올랐고, 정형화된 고급 공연장 보다는 남루하고 텅 빈 공간이 이 음악에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관계항2>에서 ‘시’를 중심으로 연결성을 지닌 <관계항3>을 연주할 공간으로 정형화된 공연장은 일순위로 배제하였다. 이 음악이 자연스럽게 호응할 만한 공간은 어디일까? 이 음악의 정서를 극대화해 줄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라는 고민이 장소 선택의 기준점이 되었다.
음악의 장르(형식)적인 측면은 조금 다르게 접근된 것이다.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음악그룹 비빙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전통음악을 소재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비빙은 이 기간 동안 불교음악 <이와 사>(2008), 가면극음악<이면공작>(2009), 궁중음악 <첩첩>(2011), 판소리 <피>(2014), <이종공간>(2015) 프로젝트 등 총 5개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후 내 솔로 프로젝트로 <관계항> 시리즈를 시작하는 시점은 그 당시 박사 논문 주제였던 <지영희 해금산조 변천과정 연구>에 천착하여 지영희 해금산조의 근원을 향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관계항1 : 경기굿>이라는 주제로 공연을 하게 되었다. 굿, 불교음악, 가면극, 궁중음악, 판소리가 주는 느낌은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적극적이다. 음악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스케일의 면에서도, 이 음악들이 향하고 있는 대상(관객)과 용도의 면에서도 그렇다. 이러한 음악을 관통해오다 문득 조선미술에 관한 책을 읽으며 풍류의 세계에 대해 궁금해졌고, 조선 백자처럼 깨끗하고 고요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내가 관통해온 여러 음악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 바로 풍류음악.
풍류의 근간은 시(詩)다. 시를 짓고, 여기에 선율을 붙이고, 노래하고, 악기로 연주하고, 시와 더불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풍류’라는 이름 아래 시, 음악, 그림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에서 행하는 소박하고 작은 예술. 내적 즐거움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행위. 이러한 풍류음악을 출발점에 두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 나섰다.
윤혜진 작곡가의 음반 <Soundscape>를 감명 깊게 들은바 있다. 이 작업과 윤혜진 작곡가의 작품 세계를 연결시키고 싶었기에 위촉 드렸다. 윤혜진 작곡가에게 이 공연의 출발점을 전하고 시 한편을 보내드렸다. 게오르크 트라클의 <아름다운 도시>라는 시가 그 즈음에 손에 잡혔다. 이 시를 시작으로 작곡가와 교류하였고, 이후 게오르그 트라클의 <밤의 노래>와 이장희의 <고양이의 꿈>,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작곡가가 추가적으로 선택하였다. 이렇게 텍스트를 중심으로 교류하여 <낮에 죽은 그림자의 고양이의 노래>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 4편의 시와 시조 <바람아>와 가곡 <태평가>의 시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총 8악장으로 약 30여분에 걸친 곡이다. 해금을 중심으로 25현 가야금, 38현 양금, 거문고, 타악으로 구성된 중주곡이다.
장영규 작곡가와의 작업은 텍스트 보다는 풍류음악인 가곡, 가사, 시조 등 음악적인 형식에 집중해 교류하였다. 가곡, 가사, 시조의 여러 음원을 찾아 듣다가 가객 홍원기(1922-1997)의 <어부사>에 귀가 멈춘다. 광활하고 고요한 물 위에 홀로 떠 있는 느낌을 주는데 그가 부른 <어부사>는 유달리 속기가 없이 느껴진다. 신선이 부르는 노래. 풍류의 경지는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 신선이 되고픈 마음이 아닐까. 작곡가 장영규와의 작업은 이 <어부사>로부터 시작했다. <관계항1 : 경기굿>의 경기굿#1, 경기굿#2의 작업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옛 명인의 소리를 차용, 샘플링하는 방식을 취한다. 해금 독주에 사운드와 영상 인스톨레이션이 병행되는 작품이다.